2025년 8월 14일 목요일

416. 78세 할머니의 인생 반란

78살 어머니, 인생의 마지막 반란

저는 이제 서울의 삭막한 아파트를 떠나, 동해의 작은 도시 속초에서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살고 있는 78살 강미자라고 합니다.
남들은 아들 잘 키워 호강만 남았다고 했지만, 제 삶은 호강이 아닌 지옥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더는 참을 수 없어, 제 인생의 마지막 반란을 시작했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독한 할머니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처음부터 독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남편을 일찍 여의고 시장 한구석에서 반찬 가게를 하며 악착같이 아들 하나를 키워냈습니다.
그 아들이 장가를 가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가 태어났을 때,

저는 한 지붕 아래 북적이며 사는 것이, 세상 가장 큰 행복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아니 행복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살았죠.

제 하루는 새벽 5시, 지긋지긋한 이명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잠이 부족해,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유기농이 아니면, 입에도 대지 않는 까다로운 손녀 세아의 도시락을 싸는 일이었습니다.

현미밥에 어젯밤 미리 재워둔 한우 장조림, 살짝 데친 유기농 브로콜리. 행여나 귀한 손녀가 탈이라도 날까, 제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수십 배는 더 신경을 썼습니다.

그다음은 아침 식사 준비, 빵을 좋아하는 며느리를 위해 토스트를 굽고, 밥을 고집하는 아들을 위해 국을 데웁니다.
그들이 식탁에 앉을 때쯤이면, 저는 이미 세탁기 2대를 돌리고 난 후였습니다.

색깔 옷과 흰 옷은 기본, 며느리는 자신의 실크 블라우스와 남편의 와이셔츠는 반드시 손빨래를 따로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으니까요.

그들의 옷감이 상하는 것은 세상이 무너질 일이고, 제 손목이 너덜너덜해지는 것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요.

모두가 집을 나선 뒤에는 청소가 시작됩니다. 구석구석 먼지를 닦고 오후 5시까지는 제 유일한 수입원인 단골 주문 반찬을 만들어 배달까지 마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쉴 틈도 없이, 다시 저녁 식사 준비가 저를 기다렸습니다. 하루하루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터였습니다.

물론 처음 몇 년은 괜찮았습니다.
손녀가 제 품에 와락 안기며, "할머니, 할머니가 해준 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라고 말해줄 때마다, 고단했던 하루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이 가족에게 꼭 필요한 존재구나, 그런 보람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온기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턴가 며느리 지연이가 저를 대하는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월급 주는 사장이 직원을 대하듯 서늘하고 딱딱하게요.

"어머니, 청소는 구석구석 다 하셨어요. 오늘 제 손님들 오기로 했으니까, 먼지 하나 없게 신경 좀 써주세요."

"어머니, 저녁은 정확히 6시 반에 차려주셔야 해요. 세아 학원 끝나고 오는 시간이랑 딱 맞춰야 하거든요. 정확히 6시 반입니다."

그 정확히라는 단어에는 단 1분이라도 어긋나면 안 된다는 차가운 명령이 담겨 있었습니다.

제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잠시 낡은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며느리는 보란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어머니, 아침부터 드라마 소리가 너무 시끄러운데요. 볼륨 좀 줄여주세요.  아~ 진짜 머리 아파!"

새벽부터 뼈가 부서져라 일하고, 잠시 갖는 그 짧은 휴식마저, 소음 취급을 당하는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 집에서 환영받지 못하는구나. 나는 이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 존재하는, 소리 없는 가구 같은 존재구나."

저는 그 집의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월급 없는 가정부, 아니 그보다 못한 존재였습니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확인하게 된 건, 어느 겨울날이었습니다.

지독한 감기 몸살로 온몸이 불덩이처럼 타오르던 날이었습니다.
평생을 쪼그려 앉아 일하느라 망가진 무릎까지 욱신거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끙끙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며느리가 방문을 빼꼼 열고는 말했습니다.

"어머니, 아프신 건 알겠는데, 저녁 준비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세아 먹을 간단하게 죽이라도 끓여주실 수 있으시죠?"

체온계는 39도를 가리키고,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찢어질 듯 아픈데, 며느리가 걱정하는 것은 시어머니 건강이 아니라 오직 저녁밥이었습니다.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아~, 이 집에서 나는 아파도 되는 사람이 아니구나."

결국 수십 년간 저를 괴롭혀 왔던 무릎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탈이 나고야 말았습니다.
의사는 닳아버린 연골을 인공관절로 교체해야 한다고, 더 미루면 평생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 민혁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민혁아, 엄마가 무릎 수술을 해야 한단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아들의 첫마디는, 제 가슴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로 남았습니다.

"수술이요? 비용은 얼마나 나온대요? 입원은 며칠이나 해야 하고요?"

일주일 정도 입원해야 한다는 제 말에, 아들은 깊은 한숨과 함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아~ 그럼 그동안 집안일은 어떡하죠? 지연이 혼자서는 절대 못할 텐데..."

쿵, 하고 무거운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평생 저를 위해 희생한 늙은 어머니가 수술대에 오른다는데, 아들이 가장 먼저 걱정하는 것은 돈과 집안일이었습니다. 제 건강, 제 고통은 이미 그의 걱정 목록에 없었습니다.

수술 당일 저는 결국 혼자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헐렁한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차가운 수술실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는데, 젊은 간호사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물었습니다.

"할머니, 보호자분은 아직 안 오셨어요?"

"아~ 다들 바빠서 못 왔어요. 괜찮아.. 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뜨거운 눈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78 평생, 가장 두렵고 무서운 순간을 오롯이 혼자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서러웠습니다.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도, 텅 빈 병실에 혼자였습니다.
찢어질 듯한 통증보다, 물 한 모금 달라고 말할 사람 하나 없다는 외로움이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퇴원하던 날,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몸을 이끌고 겨우 집에 도착했을 때, 현관에서 저를 맞이한 며느리가 던진 첫마디를, 저는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 수술은 잘 되셨어요? 저희가 너무 바빠서 가보지도 못했네요. 그런데 내일부터 집안일은 가능하신 거죠?"

그 순간, 제 안에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지연아, 의사가 한 달은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네? 한 달 동안이요?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해요? 가사도우미라도 불러야 하나? 안 그래도 돈 들어갈 곳도 많은데"

시어머니의 수술비보다, 한 달짜리 파출부 비용이 더 아깝다는 그 말을 들으며,

"아~ 나는 정말, 이 집에서 돈 한 푼 받지 않는 무료 가정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구나"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습니다.
잠결에 화장실을 가려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아들 내외의 소금거림에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여보. 솔직히 어머니 때문에 우리 생활이 너무 불편하지 않아? 사는 게 너무 빡빡해"

며느리의 그 한마디에, 제발은 바닥에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친구들 한 번 마음 편히 부르지도 못하겠고, 우리끼리 외식 한 번 하려고 해도 눈치 보이고, 이제 무릎도 저러시니, 앞으로 병원비는 또 얼마나 들겠어? 우리 노후 준비도 해야 하는데, 요즘 시설 좋은 요양원도 많다던데, 실버 타운 같은 곳 한 번 진지하게 알아볼까?"

'요양원' 그 세 글자가 제 심장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습니다.
아프기 시작하자, 이제는 쓸모가 없어졌으니, 내다 버릴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 가족을 위해 제 청춘과 건강, 모든 것을 바쳤는데, 저는 그들의 자유를 방해하는, 치워버려야 할 짐이었던 겁니다.

바로 그다음 주였습니다. 아들이 유난히 밝은 표정으로 제게 말했습니다.

"엄마, 저희 이번 주말에 일본으로 온천 여행 가려고요. 3박 4일 정도로요."

저는 마지막 남은 희망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그래, 그럼 나도 같이 가는 거니?"

"에이, 엄마는 수술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집에서 편히 쉬고 계세요.
저희끼리 다녀오는 '가족 여행'이에요.
'가족 여행' 그 두 단어가 제 가슴을 산산조각 냈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가족이 아니었구나'
그 순간, 제 마음속에서 무언가 '딱'하고 부러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건 아마도, 제가 평생을 부어잡고 있던, 마지막 미련이었을 겁니다.

"좋다. 평생을 종처럼 부려먹더니, 이제 늙고 병드니 요양원에 보낼 궁리를 해? 그렇다면 내가 먼저 이 지긋지긋한 집을 떠나주마."

아들 가족이 여행 가방을 끌고 현관 너머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면서, 저는 조용히 칼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됐어. 이만큼 참았으면 충분해."

78 평생, 남을 위해서만 살아왔지 않은가, 이제부터는 오직 나, 강미자를 위해 살아보자.
여행 둘째 날 아침, 저는 떨리는 손으로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보세요. 집을 좀 팔고 싶은데요. 급매로요."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지만, 목소리만큼은 단단하게 내뱉었습니다.
하늘이 도왔을까요? 집을 내놓은 지 단 사흘 만에, 집을 사겠다는 신혼부부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집을 보자마자 마음에 쏙 들어 했습니다.

"할머니, 이 집에서 정말 행복하게 사셨나 봐요. 집 안에 따뜻한 기운이 가득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 편이 아려웠습니다.
계약금을 받고, 일주일 뒤에 잔금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이사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유일한 내 편인, 오랜 친구 영옥이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자, 친구는
"잘했다. 미자야, 백번 천번 잘한 결정이야"라며 저를 지지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넷째 날 아침 아들 내외가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이게 다 무슨 짐들이에요? 그리고 집 안에 감도는 이 싸한 공기는 뭐고요?

며느리 지연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제 아들 역시 당혹스러운 얼굴로 저를 쳐다봤죠.
저는 소파에 조용히 앉아 그들을 바라보며 찻잔을 들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평온하고 또 가장 단호한 표정으로 말입니다.

"이사 가려고, 이 집 오늘부로 내 집이 아니다."

"네? 이사를 어디로 가신다고요! 그리고 집이 어머니 집이 아니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해괴망측한 말씀이세요?"

"해괴망책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구나. 내가 내 이름으로 된 이 집을 팔았다. 그 말이다"

"뭐라고요? 집을 팔았다고요? 저희랑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요. 어머니, 지금 제정신이세요? 그럼 저희는 이제 어디 가서 살라고요?"

그때 저는 찻잔을 내려놓고 그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저는 지난 30년간 목구멍에 걸려 있던 모든 울분과 서러움을 한꺼번에 토해냈습니다.

"알아서들 해야지, 너희가 그동안 나한테 했던 것처럼, 이제부터는 너희들끼리 오롯이 너희 가족끼리 한번 잘 살아보거라. 그리고 너희가 나보고 요양원 알아보자고 한 건 기억나니? 내가 병원에 혼자 누워 있을 때, 집안일 걱정부터 하던 건 잊었어? 내 빨래는 더럽다고 따로 빨라고 하고, 저녁 식사는 1분도 어기지 말라고, 닦달하던 것도, 전부 잊었냔 말이다."

그제야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똑똑히 들어라. 이 집은, 내가 시장 바닥에서 허리 한 번 못 펴고 번 돈으로 산 내 집이다. 너희는 이 집에 몸만 들어와 살았을 뿐, 관리비 한 번 내본 적이 있더냐?
내가 매일 새벽부터, 너희 세 식구 시중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지? 그거 전부 돈으로 환산하면, 한 달에 얼마인 줄은 아니?"

아들 민혁이가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엄마, 저희가 정말 잘못했어요.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때까지도, 제 마음 한편에는 혹시나 하는 작은 기대가 있었습니다.진심으로 뉘우치고 사과한다면, 하는... 하지만 아들의 다음 한마디에, 그 작은 기대마저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럼, 집 파신 돈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결국 돈이었습니다. 늙은 어미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어미의 재산에 대한 걱정이었던 겁니다.

"내 돈이다. 내가 알아서 쓸 것이다. 속초에 바다 보이는 작은 집 하나 사고, 남은 돈으로는 내 남은 인생, 너희 같은 것들한테 손 안 벌리고 편안하게 살 것이다."

며느리가 마지막 바락을 하듯 내뱉었습니다.

"어머니, 정말 너무 이기적이시네요."

"이기적, 평생을 희생하며 살아온 내게 이기적이라니. 그래, 내 말이 맞다. 이제부터라도 이기적으로 살아보란다. 70년 넘게, 남 좋은 일만 하고 살았으니, 이제 남은 시간은 오직 나를 위해서만 살 것이다. 나는 내일 아침 이사 가니, 너희는 이번 주 금요일까지, 이 집에서 짐을 모두 빼거라. 새 주인이 이사 들어오는 날이니까."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수십 년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내려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저는 이삿짐 차에 올랐습니다. 30년간 살았던 집이, 백미러로 속으로 점점 작아져 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쉬움보다는 해방감이 더 컸습니다.
'드디어 저 감옥에서 탈출하는구나.'
3시간을 달려 도착한 속초. 차에서 내리자, 짠 내 섞인 바다 내음이 코끝을 스쳤습니다.
새 집은 작지만 아늑했고, 창문을 열자 푸른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사 온 첫날 밤, 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저를 괴롭히던 며느리의 짜증 섞인 목소리 대신, 자연이 들려주는 평화로운 자장가를 들으며 잠들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습니다.

속초에 온 지 석 달쯤 되었을 때, 민혁이가 예고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헬쑥해진 얼굴로 제 앞에 선 아들은, 장모님 댁에서 더부살이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지연이가 이제야 엄마의 마음을 알겠다며 매일 운다고 하소연했습니다.

"엄마, 저희가 정말 잘못했어요. 다시 예전처럼, 같이 살면 안 될까요?"

저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민혁아, 너는 아직도 모르는구나. 나는 지금 이 삶이 정말 행복하단다.
더 이상 누구의 시중도 들고 싶지 않아. 대신 진짜 효도하고 싶으면, 너희끼리 오순도순 잘 살아. 더 이상 엄마를 찾지 않는 것. 그게 진짜 효도다."

저는 그날 아들에게 분명히 선을 그었습니다.
엄마의 인생에 간섭하지 말라고.
너희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라고,
그것이 서로를 위한 최선이라고.

지금 저는, 속초에 온 지 6개월이 넘었습니다. 매일 바다를 보고, 텃밭을 가꾸고, 새로 사귄 이웃 할머니들과 웃고 떠들며, 제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한 희생양이 아닙니다.
누구의 엄마도, 누구의 할머니도 아닌, 오직 나, 강미자로 살아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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